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 /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 /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 한윤형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 / 노정태
일관성 / 아이추판다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 / 노정태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 / 한윤형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 / 한윤형
프로이트, 융, 라캉 / 아이추판다
라캉적 임상 진단 및 치료 / 노정태
과학학은 반과학주의인가? / 아이추판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 한윤형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 / 노정태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 / 아이추판다
내가 보기에, 이 논쟁은 다소 황당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이러한 여러 맥락으로 논의가 번진 1차적인 책임은 아이추판다님의 최초 발언에 있는것 같다. 나는 이 논쟁을 촉발한 당사자이기도 한데, 애초에 제기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논의 자체가 안드로메다로 향해 가는 것에 대해서 (물론 그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윤형이 논쟁을 끝내다가 말고 새로 올린 글의 요지를 다시 한 번 짚기 위해서는 이 논쟁이 애초에 시작된 맥락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다시 상기해 보는 수 밖에 없다. 귀찮은 일이지만 한도 끝도 없이 우리가 우리의 공부를 확장하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일이니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아이추판다님의 발언에서 시작됐다. "라캉은 심리학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는 발언과 "라캉은 철학적인 맥락에서도 인정 받을 수 없다." 라는 발언에서 이 논쟁은 시작됐다. 이 두 문장의 각각은 이 논쟁에 참여한 누구에게도 의문의 대상이 아니다. 저 두 문장의 각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논쟁의 참여자들 중 대부분은 최소한 남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할 만큼 라캉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학문적 위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는 저 두 문장을 "때문에"로 연결시킨 데에서 생겨났다. 나와 한윤형은 그 연결고리의 부당함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인데, 이후에 이 문제는 소위 '과학-지지자' 들과 '철학-지지자' 사이에서 생겨난 야릇한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꼴을 지켜보면서 나는, 역시 내가 애초에 무엇이 문제였다고 말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졌고, 이 글은 그러한 상황에서 쓰여진 것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제기한 문제를 단순화 하자면,
2) 심리학은 오랜 기간 과학적 방법론으로 큰 발전을 이루어냈으나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의 분과학문으로서 이러한 발전의 과정에 포섭되지 못했다.
3) 때문에 라캉 정신분석학은 임상의 영역에서 손을 떼고 철학의 영역에서만 다뤄져야 한다. (그런데 라캉 정신분석학은 임상의 권위를 철학에서, 철학의 권위를 임상에서 찾고 있으므로 철학의 영역에서조차 다뤄질 수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는 인류에 해로운 학문이다.) - 괄호 부분은 아이추판다님이 아주 명확히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의 언술에서 전제되어 있는 바. -
로 정리할 수 있겠다. 아마 이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먼저 개념어부터 명확하게 정리하고 싶다. 아이추판다님이 종종 사용하는 '심리학'이라는 용어는 학문의 가장 큰 카테고리로서의 '심리학'을 뜻하는데 사용 되기도 하고, 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 심리학의 분과 학문인 '임상-심리학'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실험적, 검증적 방법론을 주되게 사용하는, '어떤- 과학적인- 심리학의 한 부분'을 뜻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어를 혼용 하면서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어휘들을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지금과 같이 산만한 논의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명확히 하고 나서, 아이추판다님이 제기한 문제들을 검토하면 우리는 우선 몇 가지 쉽게 해체될 수 있는 지점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마음의 문제' 자체가 과연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심리학 개론 수업의 기초적인 챕터에 등장하는 문제인데, 평소 같으면 교과서에 써있는 대로 답하면 그만인 종류의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혹은 정신분석학이 과학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다. 오늘날의 임상-심리학은 물론, 대부분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물리주의를 전적으로 전제하지는 않는다. 물론 각 분과 학문마다 물리주의를 전제 하기도 하고 전제 하지 않기도 하는데, 넓은 의미에서의 심리학에서 물리주의는 전제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심리학이 정신분석학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을만한 확고한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갈 수도 있는데, 다음 이야기와 연관되는 측면 만을 다루고 싶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다.
둘째는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임상-심리학의 처지가 어떤 관점에서는 정신분석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할텐데, 임상심리학자들이 왜 '의학자'가 아닌가를 생각해보면 무슨 얘기인지 감이 올 것이다. 정확히 조사해본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의학자, 혹은 그것의 희망자들 에게 "임상심리학자들이 신경정신과 의사들의 영역까지 포함해서, 독자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70% 이상이 어떤 이유에서든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답할 것이 분명하다.
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쨌든 현대의 임상-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물리주의적 견해를 100% 지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론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지지하고 있음을 들어 비판을 비껴가고, 왜 신경정신과가 아니라 임상-심리학의 영향력이 필요한 것인가를 물을 때에는 심리학의 도구가 '과학'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비껴가고, 이러한 행태 자체를 비판하면 '아직 우리 학문이 생긴지 얼마 안 되어서..' 라고 도망가는 식의 문제들은 다른 학문의 누군가에 의해 정신분석학과 똑같이 '유사-과학' 이라는 비판을 들어먹을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충분한 변호를 할 수 있다. 첫째는 과학이라는게 원래 그렇기도 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학문이 해당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과정에는 그 학문 자체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도 함께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가 과학의 본질에 대해서 계속 논의할 수도 있지만, 나는 두 번째 문제를 보다 강조하고 싶은데, 이를테면 어째서 미국의 임상심리학자들은 한국의 임상심리학자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가능한 대답은 '미국 사회의 문제다.' 라는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미국에서 임상심리학자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임상-심리학의 기반을 이루는 몇 가지 축 중의 하나인 '심리검사'의 발전을 미국의 정치, 사회적 환경이 매우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과 노동조합 때문이었는데, 당시 미국 사회는 전쟁에 적합치 않은 사람들이 군인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걸러내기 위해, 직장에서 해고될만한 정당한 사유를 공신력 있게 설명해 내기 위해 심리검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국에서 심리학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기반 위에서 발달했다. (물론 언제나 사회적 필요와 학문 발전의 욕구는 서로 상호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에서는 의사가 철밥통 이었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의 임상심리학자들은 (오늘날 처지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찬밥 신세다. 미국의 수많은 사례들을 들어 한국의 임상심리학자들은 의학의 신경정신과적 접근보다 심리학의 임상-심리학적 접근이 보다 높은 임상적 효용을 나타낸다는 주장을 열심히 펼칠 수 있지만 역시나 정치, 사회적 이유 덕분에 자기들 이론의 수준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내 얘기는,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에 대한 옹호가 가능 하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론의 헤게모니 문제는 그것의 설명력이나 임상 효용성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이 글의 전반부에 말한 그 '때문에'의 논리는 이런 방식으로 무력화 될 수 있다.
나는 위에서 서술한 내용들로 최소한 아이추판다님이 최초에 제기한 문제와 논리들은 무력화 된다고 생각한다. 글을 여기서 끝내면 사람들은 또다시 과학과 반과학 이런 얘기를 떠들기 시작할 것이다. 분명히 강조하지만, 위에서 서술한 내용들은 아이추판다님이 최초에 제기한 문제와 논리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논리적으로 가능한 부분 까지 일부러 막대를 구부려 언급한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다면 라캉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답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분위기를 전환해서 지금까지와는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가장 가치있는 부분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측면이다. 라캉의 이론은 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자체적인 인식론의 틀이 구성되어 있고, 이것을 통해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려 한다는 데에서 그 특징이 있다. 라캉에게 있어서 정신질환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왜곡되느냐의 문제이므로 라캉은 이 문제를 그가 소쉬르로 태동된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통해 만들어낸 인식론을 가지고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의 말로 상상적 동일시니 상징적 동일시니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방식은 임상-심리학의, 현대에 유행하는 소위 '인지 치료'와 많은 측면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지 치료는 환자가 가진 과거의 경험이나 인지적 오류에 의해 발생하는 정신장애를 그러한 것들의 교정을 통해 치료하려고 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미로의 한가운데에서 빠져 나오는 쥐의 예를 든다면, 인지 치료는 쥐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골목 골목마다 옳은 길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는 방식의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적인 방법은 오직 쥐를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게 할 뿐이다. 라캉의 방법은 답답하지만 쥐가 어떻게든 미로를 스스로 빠져 나왔을 때에 모든 문제가 깔끔히 해결 된다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자면, 나는 지젝의 라캉에 대한 해설을 읽고 나서 나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는 2003년 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컴플렉스들의 덩어리였다. 돌이켜보면 그 컴플렉스들을 전부 극복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경험은 심리철학을 공부하면서 제거론을 맹신했다는 것과 그 직후에 지젝의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을 이러한 경험은, 마치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쥐가 그렇듯이, 나의 인식에 제멋대로 엉켜있던 실타래들을 풀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 지젝의 책은 임상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는 데에 이 사건의 특이함이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라캉 정신분석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과학적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심리학의 문제의식이 확실히 정당한 측면이 있다. 인간의 인식은 언어로 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데에서 과학적 방법론이 아닌 다른 방법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것의 한 형태로 라캉 정신분석의 방법론이 존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스키마가 형성되는 과정은 라캉이 주장하는 인간의 인식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응용될 여지가 있지 않은가?
정말 문제는, 라캉을 지지하는, 라캉으로 임상을 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교조주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내가 언급했듯이 라캉 정신분석과 현대 심리학의 기본적인 부분 등은 서로의 언어로 호환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론은 언제나 다듬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생각할 때, 오히려 라캉의 이론은 이런 저런 갈래로 찢어지고 해체되어야 한다. 철학의 분야에서는 이미 그러한 작업이 많이 진행 되었다. 오늘날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라캉을 빼놓고 이야기 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라캉을 가지고 임상을 하는 경우에 많이 생기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라캉의 이론을 교조로 만든 것은 그의 사위의 잘못이 제일 큰 것 같다. 라캉도 사람이라 말년에 독선적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위가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다. 하여간 사위들이 나쁘다. 덕분에 라캉의 이론은 마치 미라처럼 임상의 변치않는 방법론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 같다.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의 폐해 비슷한 측면이 있다.
라캉이 철학에서 살아남은 것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그의 개념을 확장하고, 비틀고, 가다듬었기 때문이다. 라캉 정신분석이 임상적으로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이론의 기반이 다르더라도 현대의 방법론과 소통해야 하고 그것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도 변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라캉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필요한 것이지만, 더불어 현대의 임상-심리학에서의 개방적인 자세도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만일 내가 계속 심리학을 공부했었더라면 그러한 작업을 해보려고 했을것 같은데, 아마 논문 제목만 가지고도 짤려서 불쌍한 인생이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내의 심리학 조류가 영-미 편향적인 것은 사실인것 같다.
과거 좋아했던 선배가 과학철학 수업 한 학기분을 다 듣고는 "과학철학을 왜 해? 실험으로 증명하면 되는데!" 라며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에게는 신경전달물질의 행방과 이런 저런 사람들이 발명해 낸 수많은 상담기법들, 그리고 실험 설계와 통계 프로그램 언어가 더욱 중요한 문제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런 심리학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도 그런 자세를 유지한 채로 학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애초에 아이추판다님의 글에 코멘트를 한 것은 내가 심리학 전공자들의 바닥에서 수없이 보아온 이런 태도들이 연상 되어서 였다. 이런 논쟁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편견이, 우리들의 강박이, 우리들의 히스테리가 극복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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